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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이 향년 100세로 사망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1920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으며, 백선엽 장군은 우리나라 최초 4성장군이며, 625전쟁에서 혁혁한 공과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때 일제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이력으로 친일 논란도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간도특설대

백선엽은 일제 강점기때에는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복무했습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 · 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 명 규모의 대대급 부대였습니다. 친일파의 건의에 의해 간도특설대가 창설되었으며, 위관급 이상의 조선인은 약 130명이었습니다. 백선엽은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간도특설대에 복무했습니다.  

 

간도 특설대는 전시 상태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을 금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과 병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1944년 8월 1일 간도 특설대는 석갑진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동장화(東庄禾)를 토벌할 때 피난 가는 백성들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으며,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집단 구타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강력한 탄압으로 팔로군들의 투항도 이끌어 냈습니다. 잔인한 탄압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간도 특설대의 활동은 지속되었습니다. 일제의 패망 후 하북성에 주둔해 있던 간도 특설대는 연장 김찬규의 인솔 하에 심양으로 도망간 후 해산되었습니다. 일부는 남북한으로 귀환하고 일부는 중국에 거주하였습니다. 

6 ·25 전쟁

백선엽은 1949년 제5사단장을 지냈습니다. 만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단장이 된 것이지요. 초기 국군 창설에 기여했으며, 1950년 제1군단장을 지냈고, 휴전회담시 한국측 대표로 나가 휴전문서에 조인하기도 했습니다. 

 

백선엽은 다부동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고 하면서 대구를 사수했습니다. 이후 미 제8군의 반격 발판을 제공하였고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한 시간을 제공하였으며 이어 서울 수복을 거쳐 평양 탈환의 초석을 쌓았습니다.

그 후의 일대기

1952년 제2군단장을 거쳐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되었고, 1954년 군사령관, 1957년 다시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1959년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후 1960년 대장으로 예편했습니다. 1961년 주프랑스 대사 겸 네덜란드·벨기에 대사를 지냈고, 1962년 가봉·토고·세네갈·카메룬·차드·모리타니 주재대사를 겸임했습니다. 1965년 주캐나다 대사를 마지막으로 외교관직을 떠났으며, 1969~71년 교통부장관에 취임했습니다. 1971년 충주비료 사장에 취임하면서 재계에 진출했고, 곧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호남비료 사장을 겸임하다가 한국종합화학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705인 명단에 백선엽이 포함되었습니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기전 친일 행적이 꽤 비중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백선엽의 죽음으로 이념갈등이 점화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진보진영에서는 현충원에 안장하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보수진영에서는 전쟁 영웅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백선엽은 생전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사죄나 유감 표명을 한 적이 없습니다. 1993년 일본에서 펴낸 자서전에서 간도특설대 경력에 대해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책략에 그대로 끼인 모양이 되며,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라고 어영부영하게 언급했을 뿐입니다.

 

진보진영에서는 친일파 파묘 내용을 담은 국립묘지법 개정안 처리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묘소는 계속 대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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